역사 유물과 유적

첨성대


 

경상북도 경주의 역사유적지에 있는 첨성대는 해가 뜨고 지는 방향과 그 고도에 의해 발생하는 그림자의 길이와 밤낮의 길이를 이용하여 1년 12달 춘하추동 4계절의 12절기와 12중기를 측정하는 관측기구이다. 위의 첫번째 사진은 선덕여왕(632-647년) 재위 2년(633년)에 쌓은 신라 경주의 첨성대이다.

삼국유사에 선덕여왕 때에 돌을 다듬어 첨성대(瞻星臺)를 쌓았다는 기록이 있고, 고려사 지(志) 동경 유수관(東京留守官) 경주(慶州)편에 첨성대(瞻星臺)(신라(新羅) 선덕여왕(善德女王)이 축성(築成)한 것이다.)가 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지리지 경상도 경주부(慶州府)편에 첨성대(瞻星臺)(부성(府城)의 남쪽 모퉁이에 있다. 당나라 태종(太宗) 정관(貞觀) 7년 계사에 신라 선덕 여왕(善德女王)이 쌓은 것이다. 돌을 쌓아 만들었는데 위는 방형(方形)이고, 아래는 원형(圓形)으로 높이가 19척 5촌, 위의 둘레가 21척 6촌, 아래의 둘레가 35척 7촌이다. 그 가운데를 통하게 하여 사람이 가운데로 올라가게 되어 있다.)는 기록이 있다.

첨성대는 하늘의 별자리와 해와 달과 땅의 변화를 관측하여 역법을 만드는 천체 관측 기구이다. 그리고 또 첨성대는 천지신기와 일월상제의 작용을 상징하는 상징물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따라서 첨성대는 과학적인 측면에서는 절기를 측정하는 천문대이지만 종교적인 측면에서는 신기인 것이다.

위의 두번째 사진은 고려 개성 만월대의 첨성대 사진이다.(인터넷 검색 사진이다.) 현재 남아 있는 만월대 첨성대는 훼손되고 남은 일부분인데 그 원형은 다층이었던 것으로 연구되고 있다. 현재는 1층의 중심부와 돌기둥만 남아 있어 그정확한 실물을 확인하기 어렵지만 신라의 첨성대와 유사한 기능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첨성대는 별과 해와 달의 움직임과 땅의 변화를 관측하여 1년 12달 4계절 24절기와 같은 역법과 시간을 계산할 수 있는데 그 구체적인 방법이 유교의 서경(書經)에 기록되어 있다. 즉 첨성대는 기본적으로 상징물이므로 보다 더 과학적이고 정확한 역법을 계산하기 위해서는 나침반, 그림자의 길이를 잴 수 있는 규표, 물레방아와 물시계인 누각 등과 같은 관측 기구들이 동시에 사용되어야 한다. 또 별과 해와 달과 다른 행성들을 관찰할 수 있는 관측소도 필요하다. 따라서 첨성대 주변에는 천체와 역법을 측정할 수 있는 수많은 과학기구들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 선조들은 건축을 할 때 천문, 지리와 산수에 따라 그 위치를 정하고, 그것이 신기(神祇)와 관련이 있는 경우에 해당하는 상징물을 만들었다. 따라서 선덕여왕도 즉위 이후에 국인들을 하나로 통합하기 위하여 신상과 신단과 신궁의 건립을 추진하였을 것이고, 그러한 결과로 신기이자 천문대인 첨성대가 만들어 졌을 것이다. 첨성대가 단순한 천문대가 아니라 신기라는 증거는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그 앞에 남아 있는 주춧돌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주춧돌의 위치를 살펴보면 재궁을 세우기 위한 건축물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1962년에 제작된 첨성대 도면에 따르면 첨성대는 크게 상단, 중단 그리고 하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단은 2층(돌 4+4개)의 정자석으로 되어 있고, 중단은 원형 27층(돌 361+가로석 4+4개+넓은돌 1개)으로 되어 있고, 하단은 2층으로 1층은 12개의 돌로 구성되어 있고, 지하층은 4개의 돌로 구성되어 있다. 첨성대는 신기로 천지신기와 일월상제의 작용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천문대로 사절기의 1년 12달과 24절기를 측정하고 있다. 그리고 이후에 첨성대는 해시계, 물시계로 발전하였고, 이러한 종합적인 기술이 혼천의로 발전한 것이다. 따라서 첨성대 주변에는 천체와 태양력과 태음력을 측정할 수 있는 수많은 과학기구들이 필요한 것이다.

과학과 종교철학은 유사한 듯 하지만 차이점이 많다. 과학과 종교철학은 기본적으로 모두 천지만물과 인간의 작용과 현상인 기틀과 원리를 연구하여 설명한다. 하지만 과학기술은 우주와 자연의 원리 그 자체를 중시하지만 종교철학은 여기에 만연한 이기의 상징과 도를 따라 형성된 신과 상제의 형상을 더한다. 첨성대는 과학적으로 보면 역법을 측정하기 위한 휼륭한 기구이다. 그러나 종교적인 이기의 상징과 신과 상제의 형상을 적용해 본다면 역법의 측정 이외에도 신과 상제의 형상이 펼쳐져 보이므로 종교적인 상징물로서의 가치도 결코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다.

김해가 대가락(가야)의 수도 이듯이 경주는 사라, 계림 그리고 신라의 수도이다. 따라서 경주의 문화정책은 신라문화의 보존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그리고 여기에 보충적으로 고려나 조선의 유적과 유물이 보존되어야 한다. 또 가야지방이 삼한의 변한지역이듯이 신라지역은 삼한의 진한지역이다. 따라서 유적과 유물의 보존은 상고시대로 부터 전해져 온 우리 고유의 전통신앙인 신교(神敎)와 유교(儒敎)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그리고 여기에 보충적으로 불교(佛敎)가 가미되어야 한다.

암각화


위의 사진은 반구대 암각화와 양전동 암각화의 모습이다.(출처는 문화재청이다.) 암각화는 고대인들의 신앙과 생활을 잘 표현해 주는 바위그림이다. 암각화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으나 고대인들의 조상신과 완전함에 대한 숭배사상을 알 수 있다. 암각화에는 하늘, 땅, 동심원, 사람, 자연, 동식물과 그물이나 활 같은 도구들이 새겨져 있다. 암각화에 새겨진 그림들은 완전하고 신령스러운 상징물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동심원은 일월을 표현한 것이고 사람은 상제와 읍성민의 모습을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동물은 완전하고, 신령스러운 생물을 표현한 것이고, 도구들은 완전하고 유용한 사물을 나타내는데 이들은 모든 것이 완전한 신의 성격과 유사하므로 신물로 보는 것이다. 반구대 암각화는 오랫동안 물에 잠겨 있어 침식되었고, 바위에 있는 이끼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많이 훼손되었다. 그리고 양전동 암각화는 주변을 지나는 도로와 터널이 건설되면서 암각화 주변에 있던 석상들이 상당 부분 훼손되었다. 보존대책이 미흡한 것이다.

산상과 환구

우리 선조들은 신단과 재궁, 소도와 태묘을 세워 신앙하였고, 산마루에는 산상을 조성하여 신앙하였고, 산 어귀에는 국조신의 신사(神祠)를 세워서 신앙하였고, 마을에는 당산(堂山)이 있었다. 삼한 이래로 모두 10월 상일(上日)에 국중대회(國中大會)를 열어 제사하였고, 삼국은 천지에 제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신궁 옆에는 경당이 있어 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이들은 원시신앙의 유적으로 매우 중요한 문화유산임을 알 수 있다. 강에 보를 설치하는 경우, 계곡에 댐을 설치하는 경우, 산을 관통하는 터널을 만드는 경우, 산천을 가로지르는 도로를 건설하는 경우, 철탑이나 케이블카를 설치하는 경우 그리고 스키장이나 골프장을 만드는 경우에 문화유적지를 철저히 조사해야 하는 이유이다.


위의 첫번째 사진은 김해에 있는 산상의 모습이다. 그리고 두 번째 사진은 경주 포석정으로 당산과 환구의 모습으로 추측된다. 포석정의 용도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포석정은 제단 예술의 극치인데 많은 부분이 훼손되어 있어 안타깝기 그지없다. 당산은 고려시대에는 성황으로, 조선시대에는 성황당 또는 서낭당으로 그 명칭이 변경되었고 제사의 대상도 해당 지역의 유명인사로 변모하였다.

과거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뿐만 아니라 가야의 수도였던 김해와 백제의 수도였던 공주, 부여 등에 존재하던 수많은 문화유산들이 개화기시대와 일본 강점기를 거치면서 외래인의 도굴로 상당 부분 파괴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최근에는 그나마 남아있던 문화유산들이 개발이라는 미명으로 파괴되고, 반출되고, 왜곡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곳에 뿌리를 둔 수많은 후손들이 개발정책에 의해 그 터전을 잃고 타 지역으로 이주하고 있으며, 이들의 빈 자리를 외래 종교인들이나 혼혈인들이나 다문화 가정인들이 대체하고 있다. 역사유적지가 기이한 도시로 변질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고인돌(지석)과 선돌

고대에는 주로 돌로 무덤을 만들었는데 지석묘가 대표적이다. 지석묘는 묘지 위에 큰 돌을 덮어 두는 것이 있고, 묘지 위에 큰 돌을 세우고 개석을 덮어 두는 것이 있고, 무덤 앞에 선돌을 세워 두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무덤은 고대에는 돌무덤으로 변화되었고, 이후에는 봉토로 무덤을 덮고 묘사를 짓기도 하였다.


위 사진은 지석묘의 사진이다. 지석묘는 대부분 통치자들의 무덤인 것으로 보인다. 지석묘는 맨 밑에 3개의 가로돌을 놓고, 그 위에 세로로 2개의 돌을 세우고, 그 위에 1개의 돌을 얹어 만드는 탁자형 지석묘와 커다란 1개의 돌을 놓고 그 위에 덮개돌을 얹어 만드는 덮개형 지석묘와 선돌을 여러개 세워 만든 입석형 지석묘가 있다. 지석묘는 대부분 통치자들의 무덤으로 고인돌은 무덤에 사용된 지석이다. 일반인들은 주로 공동으로 매장하였는데 그 위에 돌을 쌓고 그 앞에 지석을 세웠다고 한다. 산 위의 석탑이나 마을의 돌무덤이 여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지석묘와 유사한 것으로 선돌이 있다. 선돌은 그 형태는 서로 유사하지만 성격은 매우 다른데 지석묘의 기능을 한 것도 있고 또 표지석의 기능을 한 것도 있다. 따라서 선돌에 새겨진 그림, 선돌의 모양, 선돌에 새겨진 글씨 등으로 선돌의 성격을 판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리고 위 오른쪽에 있는 사진은 평평하게 잘 다름어 진 것으로 보아 제단이나 덮개돌을 받치는 받침돌로 볼 수 있다. 상고시대의 무덤은 주로 돌로 장식을 하였다. 권력자의 경우 가족묘가 있었고, 일반인들은 대부분 집단적으로 매장을 하였다. 무덤은 돌로 탑을 쌓아 만든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고대로 내려오면 왕들의 무덤은 넓어지고 높아져 탑이나 산모양을 이루었다.

상제와 신령님

상(上)은 위 또는 이전이라는 뜻이고 제(帝)는 제왕이라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상제(上帝)님은 47분의 단군과 그 이전의 18분의 환웅과 그 이전의 9분의 환인을 지칭한다. 환인은 천제(天帝)로 호칭되었고, 환웅은 천황(天皇) 또는 천왕(天王)으로 호칭되었고, 단군은 천왕(天王)으로 호칭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상제는 중화의 오제(五帝)이신 태호복희씨, 염제신농씨, 황제공손씨, 전욱고양씨와 제곡고신씨를 지칭하기도 한다. 상고시대에 청구의 왕족이 중화의 왕이 되기도 하였고, 중화의 왕이 청구와 삼한의 왕이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일월의 황천(皇天)과 황지(皇地)를 황상제로 칭하기도 하고, 대성(大城)의 성주가(城主家)를 상제로 칭하기도 한다.






위의 사진 중에 첫번째와 두번째 사진은 삼성상제의 모습이고, 세번째 사진, 네번째 사진과 다섯번째 사진은 단군천왕의 모습이고, 여섯번째 사진은 기자왕의 모습이다. 삼성상제를 모시고 제사한 구월산의 삼성사가 존속한 까닭으로 이들의 모습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삼국 이래로 삼성과 함께 삼한의 시조이신 기자(箕子)의 사당을 세워 경배하기도 하였다.

문화유산 보전 대책

하나의 국가는 국민, 영토 그리고 주권으로 구성된다. 한 국가의 정통성은 역사와 문화와 문명에 그 바탕을 둔다. 따라서 외래의 종교주의자들에 의해, 식민지주의자들에 의해 그리고 야만족들에 의해 역사와 문화주권이 왜곡되는 것을 막아야 하고, 건전한 국인들이 이들의 하수인이 되거나 혼혈화되는 것을 막아야 하고, 역사 유물과 유적이 파괴거나 도굴되어 외부로 유출되는 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상고사를 출판 보급하여 우리의 상고 기록이 사라지거나 외래화 되는 것을 방지해야 한다. 개발이라는 미명으로 더 이상 역사 유물과 유적들이 파괴되거나 반출되지 않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여야 한다. 그리고 한민족의 건전한 몸과 마음과 영혼을 야만화하고, 이 땅의 주인을 대체하려는 야만인들의 비행을 차단해야 한다. 이러한 노력이 있어야만 우리 한반도 문명이 남의 것이 되지 않고 우리의 것이 되는 것이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한반도의 유물과 유적들을 보전하기 위해서는 전국의 크고 작은 산과 강과 바닷가를 국립공원으로 지정하거나 그린벨트로 보호하거나 역사유적지구로 보전해야 한다. 그리고 역사책과 경전뿐만 아니라 전통종교의 신상과 신단과 신궁은 모두 중요 문화재로 지정해야 한다. 그리고 신단과 신궁이 있던 자리와 왕궁이 있던 자리도 역사유적지구로 보전하여야 한다. 현재 존재하는 고택의 보전방안도 강구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의 고유문화이자 세계인류의 문화유산인 한반도의 유물과 유적을 보전할 수 있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대한제국은 마지막 왕조였다. 지금 우리는 민주 공화국에서 생활하고 있지만 불과 100년 이전의 사람들은 왕조 국가에서 생활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건국된 수많은 국가들의 흔적들이 전국 곳곳에 남아 있다. 이들 문화유산들은 역사적으로 그 가치가 인정되므로 보전되고 복원되어야 한다.

일반 문화재뿐만 아니라 석상과 석단을 훔치는 행위는 문화재 절도에 해당한다. 석상과 석단은 신앙의 대상이 되는 물건이므로 문화재에 해당한다. 실제로 암벽조각, 토우, 십이지상, 능묘조각, 장승, 석기, 골각기, 산신상, 성모상, 성인상, 석조물, 입석(선돌), 남녀근석, 제단(성황단), 석간(돌기둥) 등이 동산 문화재로 규정되어 있다. 따라서 이들을 훼손하거나 허가없이 반출하는 행위는 모두 불법행위가 된다.

개발로, 도굴로, 매매로 점차 사라지고 있는 이 땅의 유물과 유적을 지키기 위해서는 개발시 문화재 조사를 철저히 하여 역사 유적지구인 경우 다른 장소를 물색해야 하고, 전국의 산과 하천과 강과 해안가를 국립공원이나 역사 유적지구로 보존해야 한다. 과거로부터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된 역사 문화유산은 한순간에 훼손될 수 있다. 그리고 한번 훼손된 유물과 유적을 복원하는 일은 쉽지 않다. 따라서 유물과 유적의 보전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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