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의 종교유적

종교는 한 민족의 전통과 그 구성원들의 영적 깨달음의 집합체이다. 따라서 종교는 해당 민족의 위치에서 천지의 우주, 자연, 만물 그리고 인간의 형성에 관한 궁극적인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을 준다. 또 종교에는 과학적인 진리가 포함되어 있다.

천지인의 주재자가 운행하는 인간과 자연의 현상을 파악하고 그를 숭배하기 위한 신단 등이 그것다. 우리 역사책에는 신단과 소도 신궁, 산상과 웅상, 지석단과 지석묘, 수혈과 신사 등에 관한 수많은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다. 또 실제로 전국 각지의 산천과 강가와 바닷가에는 수많은 신상과 신단이 존재하고 있다.

현재 토지에 건물이 들어서고, 산과 강과 해안이 개발되면서 우리 고유의 신상과 신단과 신궁은 점차 사라지고 있다. 외래의 일부 종교주의자와 식민지주의자 그리고 흑구, 유구, 왜구 등 야만족들은 반도를 쉽게 잠식하기 위하여 개발이라는 미명으로, 문화재 발굴이라는 미명으로 또는 휴양지 조성이라는 미명으로 우리 고유의 신상과 신단과 신궁을 왜곡하거나 파괴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최근 문화 다양성이라는 국제적인 흐름으로 인해 세계 각국은 자신들의 전통문화를 새롭게 개선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들 중에는 자신들의 낡은 종교를 새롭게 개선하거나 새로운 종교를 창설하기 위하여 무리한 방법을 동원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이러한 과정에서 일부 극단주의자들에 의해 한반도의 수많은 종교 유물과 유적들이 파괴되거나 해외로 밀반출되고 있는 것이다. 개발로, 도굴로, 매매로 점차 사라지고 있는 이 땅의 신상과 신단과 신궁을 지키기 위해서는 개발시 문화재 조사를 철저히 하여 문화유적지구인 경우에는 다른 장소를 물색해야 하고, 전국의 산과 강과 해안가를 국립공원이나 역사유적지구로 보존해야 하고, 역사책과 경전뿐만 아니라 우리 고유의 신상과 신단과 신궁을 문화재로 지정하여야 한다.

이름난 문화재뿐만 아니라 신상과 신단을 훔치는 행위는 재물의 절도에 해당한다. 그리고 신상과 신단은 신앙의 대상이 되는 물건이므로 문화재에 해당한다. 실제로 암벽조각, 토우, 십이지상, 능묘조각, 장승, 석기, 골각기, 산신상, 성모상, 성인상, 석조물, 입석(선돌), 남녀근석, 제단(성황단), 석간(돌기둥) 등이 동산문화재로 규정되어 있다. 따라서 이러한 문화재를 훼손하거나 허가없이 반출하는 행위는 불법행위가 된다.

오랜 역사를 통해 아시아 서부에서 밀려 온 오랑캐와 인도양, 동남아, 남중해와 일본 주변섬들을 중심으로 하는 해적들이 이 땅에 유입된 사실은 역사를 통해 잘 알 수 있다. 개화기와 일본 강점기 이후로 역사 및 문화 왜곡행위와 유물과 유적의 파괴행위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타국의 이름난 문화재뿐만 아니라 종교 유물과 유적을 파괴하거나 약탈하는 것은 범죄행위일 뿐만 아니라 이들을 반입하는 국가의 국민들에게 잘못된 정신문화와 종교관을 심어줄 우려가 있으므로 하루빨리 금지되어야 한다.

위의 사진은 배달국시대에 사용된 녹도문으로 기록된 천부경이다. 갑골문자로 보는 사람도 있지만 서로 다른 글자가 많아 후기 녹도문으로 보는 것이다. 우리 고유한 전통종교인 신교가 국문정음(가림토문자)을 사용하던 단군조선 이전인 배달국 시대에도 존재하였음을 보여주는 좋은 자료이다. 환국에서는 구설과 도형이, 신시에는 녹서가, 단군조선에서는 전서와 전자(가림토문자)가 사용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 천단

신교의 종교시설은 전국 각지에 존재하였는데 현재까지도 부도, 신시, 소도의 신상과 신단과 신궁의 흔적들이 남아 전해지고 있다. 천단, 제천단 또는 천제단은 글자 그대로 하늘에 제사하는 단이다. 현재 전국의 명산대천과 강과 바닷가에는 신단과 제단이 존재한 흔적이 있고, 신궁과 신사의 자리터도 남아 있다. 신단과 신궁에서 제사하는 풍속은 아주 먼 고대로부터 시작되었는데 그 풍속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위 사진은 강화도 참성단의 모습이다.

위 사진은 환구단의 사진이다. 환배조로부터 국교였던 신교는 고려시대에는 유교, 도교와 불교의 등장으로 민간에 대한 교화력이 약해졌다. 특히 고려와 조선은 중국의 간섭을 많이 받는 국가였기 때문에 국왕이나 국인들이 삼신제례를 거행하기가 매우 어려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 명칭이나 형태는 조금씩 달라졌어도 하늘에 대한 제사는 계속되었는데 고려시대에는 토속신에 대한 제례인 팔관회 등이 거행되었고, 조선시대에도 역시 천단이나 교외 등에서 고유제나 기우제 등이 거행되었다.

삼신제례를 행한 대표적인 천단이 옛부터 전해져 내려온 고려의 환구단이다. 조선 초기에는 그 명칭이 원단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환구단으로 바뀌었다. 산 정상에 존재하는 천단과 달리 환구단은 성 안에 존재하는 제단이다. 환구단은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이후 남별궁에 세운 것이다. 황궁우에는 신위가 안치되어 있다. 교외에도 수많은 천단들이 축조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조선 초기에 새로운 환구단이 만들어 졌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성 안에 2개의 천단이 존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우측에 원형과 사평면의 석축 그리고 원뿔형태의 지붕으로 구성된 곳이 천단이다. 좌측의 팔각모양의 건물은 황궁우이다. 원래 제사때 사용하는 신위를 보관하는 장소는 따로 있는데 황궁우는 그 규모로 보아 신위를 직접 모시고 제사한 곳으로 추측된다. 따라서 현재의 환구단을 복원하기 위해서는 주위에 있는 호텔건물들을 매입하고 그 앞을 지나는 도로를 우회하여 신단과 신궁 자리를 확보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본다.

2. 산상(山像)


우리 선조들은 옛부터 산이나 계곡에는 산상을, 산이나 마을 어귀에는 웅상을 그리고 산마루나 마을에는 부도, 신시, 소도의 신궁을 세워 신앙하였다. 산상에는 선인이 되신 상제의 모습이 돌로 조각되거나 토석으로 주조되어 있다. 그리고 웅상은 거목에 환웅의 신상을 봉한 것이다. 부도, 신시, 소도에는 신단과 신궁이 있었고, 신궁 옆에는 경당이 있어 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위의 첫 번째 사진은 경북지방에 있는 산상의 모습이다. 그리고 두 번째 사진은 우리가 암각화로 알고 있는 울산 반구대의 모습이다. 동심원, 사람의 형상, 동물의 형상, 그물이나 활같은 도구들이 새겨져 있다. 동심원은 광명을 표현한 것이고 사람은 선인의 모습을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동물은 완전하고, 신령스러운 생물을 표현한 것이고, 도구들은 완전하고 유용한 사물을 나타내는데 이들은 모든 것이 완전한 신의 성격과 유사하므로 신물로 보는 것이다.

산상이 산 정상이나 강 상류나 계곡에 존재하고, 웅상이 마을 어귀에 존재하는데 그 이유는 초기에 사람들이 산이나 계곡에서 생활하다가 차츰 강이 인접한 마을로 이주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산상과 웅상과 암각화는 원시신앙의 유적으로 매우 중요한 문화유산임을 알 수 있다. 강에 보를 설치하거나 계곡에 댐을 설치하거나 산을 관통하는 터널이나 산천을 가로지르는 도로를 건설할 때 철탑이나 케이블카를 설치할 때 스키장이나 골프장을 만들때 문화유적지를 철저히 조사해야 하는 이유이다.

위의 사진은 암각화의 모습이다. 양전동 암각화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으나 반구대의 암각화와 같이 고대인들의 조상과 완전함에 대한 숭배사상을 알 수 있다. 주위에 있던 산상의 모습들이 도로와 터널의 건설로 파괴되어 안타깝기 그지없다.





위의 첫번째 사진은 고려 개성 만월대의 첨성대 사진이다. 하지와 동지를 기준으로 24절기를 표시한 것이다. 두번째 사진은 선덕여왕(632-647년) 재위 2년(633년)에 쌓은 신라 경주의 첨성대이다. 삼국유사에 선덕여왕 때에 돌을 다듬어 첨성대(瞻星臺)를 쌓았다. 삼국사절요에 신라에서 첨성대를 만들었다. 돌을 쌓아 만들었는데 위는 모지고 아래는 둥글었으며 가운데는 비어있어 사람이 가운데에서 올라갔으니 높이가 몇 길(丈)이었다. 고려사 지(志) 동경 유수관(東京留守官) 경주편에 첨성대. 신라(新羅) 선덕여왕이 축성한 것이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지리지 경상도 경주부(慶州府)편에 첨성대. 부성(府城)의 남쪽 모퉁이에 있다. 당나라 태종(太宗) 정관(貞觀) 7년 계사에 신라 선덕여왕이 쌓은 것이다. 돌을 쌓아 만들었는데 위는 방형(方形)이고, 아래는 원형(圓形)으로 높이가 19척 5촌, 위의 둘레가 21척 6촌, 아래의 둘레가 35척 7촌이다. 그 가운데를 통하게 하여 사람이 가운데로 올라가게 되어 있다는 기록이 있다.

세번째 사진은 가야 김해의 기마인물상이다.

우리 선조들은 건축을 할 때 풍수(천문, 지리와 산수)에 따라 그 위치를 정하고, 그것이 신상이나 신단이나 신궁인 경우 그 근원을 상징하는 상징물을 만들었다. 따라서 선덕여왕도 즉위 이후에 국인들을 하나로 통합하기 위하여 신상과 신단과 신궁의 건립을 추진하였을 것이고, 그러한 결과로 신기이자 천문대인 첨성대가 만들어 졌을 것이다.

첨성대가 단순한 천문대가 아니라 신기라는 증거는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그 앞에 남아 있는 주춧돌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주춧돌의 위치를 살펴보면 재궁을 세우기 위한 건축물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1962년에 제작된 첨성대 도면에 따르면 첨성대는 크게 상단, 중단 그리고 하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단은 2층(돌 4+4개)의 정자석으로 되어 있고, 중단은 원형 27층(돌 361+가로석 4+4개+넓은돌 1개)으로 되어 있고, 하단은 2층으로 1층은 12개의 돌로 구성되어 있고, 지하층은 4개의 돌로 구성되어 있다. 첨성대는 신기로 황천후토와 천신지기의 작용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천문대로 사절기의 1년 12달과 24절기를 측정하고 있다.

따라서 첨성대는 역법과 시간을 계산할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상징물이므로 보다 더 과학적이고 정확한 역법을 계산하기 위해서는 나침반, 규표, 물레방아와 같은 기구들이 동시에 사용되어야 한다. 이들이 해시계, 물시계로 발전한 것이다. 또 계산하기 까다로운 태양력을 보충하기 위하여 태음력을 계산할 수 있는 달과 별의 관측소도 필요하다. 이러한 종합적인 기술이 혼천의로 발전한 것이다. 따라서 첨성대 주변에는 천체와 태양력과 태음력을 측정할 수 있는 수많은 과학기구들이 필요한 것이다.

과학과 종교철학은 유사한 듯 하지만 차이점이 많다. 과학과 종교철학은 기본적으로 모두 우주, 자연과 인간, 만물의 원리와 현상을 연구하여 설명한다. 하지만 과학기술은 우주와 자연의 논리 그 자체를 중시하지만 종교철학은 여기에 만연한 이기의 상징과 이를 다스리는 주재자인 신의 형상을 더한다. 첨성대는 과학적으로 보면 역법을 측정하기 위한 휼륭한 기구이다. 그러나 종교적인 이기의 상징과 신의 형상을 적용해 본다면 역법의 측정 이외에도 수많은 신의 배위가 펼쳐져 보이는 것이다.

김해가 대가락(가야)의 수도 이듯이 경주는 사라, 계림 그리고 신라의 수도이다. 따라서 경주의 문화정책은 신라문화의 보존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여기에 보충적으로 고려나 조선의 유적과 유물이 보존되어야 한다. 또 가야지방이 한반도 변한지역이듯이 신라지역은 진한지역이다. 따라서 풍수나 유적과 유물의 보존은 상고시대로 부터 전해져 온 우리 고유의 전통신앙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여기에 보충적으로 삼국시대 이후에 들어온 불교나 도교나 유교의 유물과 유적들이 보존되어야 한다. 발굴되는 문화재를 인도의 불교문화나 중국의 유교문화나 일본의 식민지문화로 치부하는 것은 우리의 고유한 전통문화를 말살하는 행위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하루빨리 깨달아야 한다.



위의 좌측의 사진은 귀신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으로 귀면(鬼面)이라고 한다. 귀신은 블랙 세력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이는데 부조화와 역행을 일삼는 음의 세력이자 부정한 기운이다. 성 안의 백성들이 신과 신령을 신앙한 반면에 성 밖의 이방인 야인족들은 귀신이나 악령을 숭배하기도 하였다. 외래 이주민의 귀신이나 악령문화가 유입되었을 수도 있고, 이들의 총신이 악령이 되었을 수도 있다. 역사책에는 해적, 오랑캐 등 야민인들이 저지른 비인간적인 귀신이나 악령 숭배행위가 간헐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들 야만족들은 고대로 부터 우리 한민족의 조상신을 귀신화 하고 있는데 이는 야만세력의 신이지 우리의 신은 아니다.

우측 사진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치우천왕의 모습이다. 생전의 모습을 그대로 묘사한 영정과 달리 신령의 모습은 사람이 사후세계에서 가지는 형상이므로 영정과 동일하지 않을 수 있다.

3. 웅상(雄像)

웅상은 주로 산어귀나 마을 어귀에 존재하는 신단이다. 삼한시대에 소도는 낮은 산마루나 마을에 존재하였다. 소도가 산에 존재하는 경우에는 산어귀를 빙둘러 환수(桓樹)와 환화(桓花)를 심고 돌로 담을 쌓았다고 한다. 환수는 주로 참나무, 소나무, 잣나무 등이 사용되었고, 환화는 무궁화, 진달래, 복사꽃 등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단군세기에 따르면 소도에 빙둘러 환수를 심고 가장 큰 것을 골라 웅상을 봉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존하는 웅상 앞에는 대부분 석상이 존재하고 있다.

소도는 하나의 산 전체 또는 하나의 마을 전체로 구성되었으므로 소도를 둘러싼 환수는 곳곳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성황당이 그것이다. 환배조시대의 통치제도는 천왕(天王)-한(韓)과 분봉국의 왕(王)과 군주(君主)-국읍의 성주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고대국가에서 통치제도가 완비되면서 산성을 지키던 성주(城主)와 소도에서 종교업무를 담당하던 선인(仙人)의 세력이 약화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위의 사진은 경주 포석정의 모습이다. 포석정의 용도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포석정은 신단과 신궁 예술의 극치인데 많은 부분이 훼손되어 있어 안타깝기 그지없다.

포석정 옆에는 나정이 있는데 박혁거세왕이 태어난 곳이라고 한다. 팔각의 건물물과 우물이 존재한 흔적이 있다. 즉 나정에 팔각의 정자와 우믈이 존재한 흔적이 있고, 그 아래에 사당이 존재한 흔적이 있다.

과거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뿐만 아니라 가야의 수도였던 김해와 백제의 수도였던 공주, 부여 등에 존재하던 수많은 문화유산들이 개화기시대와 일본 강점기를 거치면서 외래인의 도굴로 상당 부분 파괴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최근에는 그나마 남아있던 문화유산들이 개발이라는 미명으로 파괴되고, 반출되고, 왜곡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곳에 뿌리를 둔 수많은 후손들이 개발정책에 의해 그 터전을 잃고 타 지역으로 이주하고 있으며, 이들의 빈 자리를 외래 종교인들이나 혼혈인들이나 다문화 가정인들이 대체하고 있다. 역사유적지가 기이한 도시로 변질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4. 산신령과 삼성







위의 작은 사진 중 첫번째와 두번째와 세번째 사진은 산신령의 모습이다. 그리고 큰 사진 중 첫번째 사진은 옥황상제의 모습으로 환인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그리고 두번째 사진은 환웅의 모습이고, 세번째와 네번째 사진은 단군의 모습이다. 단군을 모시고 제사한 구월산의 삼성사가 일제시대까지 존속한 까닭으로 이들의 모습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세번째 사진은 코수염에 덧칠을 한 흔적이 있고, 네번째 사진은 왼쪽눈에 낙서를 한 흔적이 있어 안타깝다. 다섯번째 사진은 왼쪽눈의 낙서를 지운 사진이다. 이외에도 일본 강점기와 군사정부 시절에 단군교와 대종교에서 새로 제작한 단군영정과 단인단웅단군의 영정이 있으나 원본과는 거리가 있는 것 같다.

5. 소도(蘇塗)

부도, 신시, 소도의 신단과 신궁은 우리 전통종교인 신교의 종교시설이다. 소도는 낮은 산마루나 마을에 위치하였는데 환수와 환화 그리고 돌담으로 둘러쌓여 있었다고 한다. 소도 옆에는 교육시설인 경당이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소도에는 삼신을 중심으로 조상신을 모신 신단과 신궁이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

6. 수혈

신교의 영향력이 약해진 고려나 조선시대에는 수혈이라는 종교시설이 등장한다. 산천에 위치하는 동굴에 신상을 모신 곳이 있는데 이곳을 수혈이라고 한다. 삼국의 유적지 주변뿐만 아니라 이러한 동굴들도 역시 폐기물 처리장으로 사용되고 있어 안타깝기 그지없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조선후기까지 선인들이 존재하였고, 아직까지 산천이나 강 하류나 바닷가에는 전통종교의 흔적들이 많이 남아 있다.

7. 지석단과 지석묘

산천에 존재하는 신단과 달리 평지에 존재하는 지석묘가 있다. 지석묘는 맨 밑에 3개의 가로돌을 놓고, 그 위에 세로로 2개의 돌을 세우고, 그 위에 1개의 돌을 얹어 만드는 탁자형 지석묘와 커다란 1개의 돌을 놓고, 그 위에 덮개돌을 얹어 만드는 덮개형 지석묘와 선돌을 여러개 세워 만든 입석형 지석묘가 있다. 지석묘는 무덤 앞에 세워진 제사시설로 오늘날의 묘사(廟詞)와 유사한 기능을 한다. 신단이 마을 공동체의 공동묘지인 반면에 지석묘는 대부분 통치자들의 무덤인 것으로 보인다. 신단은 무덤 위에 돌을 쌓은 것으로 산천의 석탑이나 돌무덤이 여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9. 선돌

지석묘와 유사한 것으로 선돌이 있다. 선돌은 그 형태는 서로 유사하지만 성격은 매우 다른데 신단의 기능을 한 것도 있고, 지석묘의 기능을 한 것도 있고, 또 표지석의 기능을 한 것도 있다. 따라서 선돌에 새겨진 그림, 선돌의 모양, 선돌에 새겨진 글씨 등으로 선돌의 성격을 판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리고 위 오른쪽에 있는 사진은 평평하게 잘 다름어 진 것으로 보아 제단이나 신상을 받치는 받침돌로 볼 수 있다.

상고시대의 무덤은 주로 돌로 장식을 하였다. 권력자의 경우 가족묘가 있었고, 일반인들은 대부분 집단적으로 매장을 하였다. 무덤은 돌로 탑을 쌓아 만든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고대로 내려오면 왕들의 무덤은 넓어지고 높아져 탑이나 산모양을 이루었다.

9. 우리 문화와 문명을 보존해야 한다.

이전에는 한글을 모르는 사람을 문맹이라고 놀렸다. 최근에는 학력은 높아졌지만 우리 전통문화를 잘 알지 못하는 신문맹인들이 늘어나고 있다. 사실 우리의 학교 교육이 뛰어난 전문가를 만드는 제도는 아니다. 알 듯 모를 듯 어중간히 배워 사회에 나온다. 다행히 겸손하고 부지런하여 사회에서 다양한 학문을 학습하거나 연구한 사람들은 전문가가 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대부분 비전문가로 남게 된다. 또 주변사람들의 입김으로 왜곡된 시각을 가지기 쉽다. 이들이 전문가들의 의견을 경청하지 아니하고, 독선적으로 행동할 경우에 수많은 갈등과 피해가 발생하게 된다.

하나의 국가는 국민, 영토 그리고 주권으로 구성된다. 한 국가의 정통성은 역사와 문화와 문명에 그 바탕을 둔다. 따라서 외래의 종교주의자들에 의해, 식민지주의자들에 의해 그리고 야만족들에 의해 역사와 문화주권이 왜곡되는 것을 막아야 하고, 건전한 국인들이 이들의 하수인이 되거나 혼혈화되는 것을 막아야 하고, 역사 유물과 유적이 파괴거나 도굴되어 외부로 유출되는 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상고사를 출판 보급하여 우리의 상고 기록이 사라지거나 외래화 되는 것을 방지해야 한다. 개발이라는 미명으로, 문화재 복원이라는 미명으로 더 이상 역사 유물과 유적들이 파괴되거나 반출되지 않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여야 한다. 그리고 한민족의 건전한 몸과 마음과 영혼을 야만화하고, 이 땅의 주인을 대체하려는 야만인들의 비행을 차단해야 한다. 이러한 노력이 있어야만 우리 한반도 문명이 남의 것이 되지 않고 우리의 것이 되는 것이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한반도의 유물과 유적들을 보전하기 위해서는 전국의 크고 작은 산과 강과 바닷가를 국립공원으로 지정하거나 그린벨트로 보호하거나 역사유적지구로 보전해야 한다. 그리고 역사책과 경전뿐만 아니라 전통종교의 신상과 신단과 신궁은 모두 중요 문화재로 지정해야 한다. 그리고 신단과 신궁이 있던 자리와 왕궁이 있던 자리도 역사유적지구로 보전하여야 한다. 현재 존재하는 고택의 보전방안도 강구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의 고유문화이자 세계인류의 문화유산인 한반도의 유물과 유적을 보전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