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물과 유적

“사람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러한 의문에 나름대로의 해답을 제시하는 것이 종교이다. 세계에는 수많은 종교들이 있었고 현재에도 다수의 종교들이 존재하고 있다. 종교는 신과 상제를 모시면서 인간이 신과 상제의 자손임을 인식하고, 세상 및 세계와 인간의 연계성을 관찰하면서 교화로 완전한 인간이 될 수 있는 가르침을 제공한다. 그리고 세상을 평화롭게 만드는데 필요한 규범을 제공하고, 또 이승에서나 저승에서나 이루지 못한 공덕을 이루고 타고난 습관을 고쳐서 법궤를 벗어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도 한다.

세계에는 수많은 종교들이 있지만 모든 종교가 바른 것만은 아니다. 종교는 허구인 소설과 다르고, 또 가르치기 위해 연구하는 학문도 아니다. 종교는 한 민족의 전통과 그 구성원들의 영혼의 깨달음의 집합체로 영혼과 혼백 그리고 천지와 세상 그리고 인간과 자연만물의 형성에 관한 궁극적인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을 주기도 한다. 그리고 종교는 과학과 유사하지만 과학 그 자체는 아니다. 종교에는 과학 이외에도 한 민족의 고유한 전통과 태초의 진리에 도달하려는 인간의 노력과 신과 영혼과 혼백의 신성한 힘과 이들과 감응하는 인간의 신통력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종교는 국인과 민족의 위치에서, 한 민족의 전통과 그 구성원들의 영혼의 깨달음의 집합체로 천지인의 생성과 사멸과 순환에 대한 궁극적인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사람들의 심신이 타락하여 현실이나 꿈에서 신의 모습을 보거나 목소리를 듣기가 어렵다. 그러나 태초의 진리에 이르면 자연 속에서나 꿈 속에서 신령과 소통하거나 감응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우리 선조들은 신계의 신과 조상의 신령과 개인의 영혼과 혼백을 구분하였다. 한반도와 그 주변지역에서 발생한 종교가 언제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환국시대부터 구전되어온 경전인 천부경과 신시 배달국 환웅천왕께서 조술하신 삼일신고가 배달국 때에는 녹도문자로, 단군 조선국 때에는 국문정음(가림다문자)으로 체계화 되었다고 전한다. 그리고 참전계경은 배달국시대부터 존재하던 전인들의 계율(佺戒)을 고구려의 을파소선생이 발견하여 널리 보급하였다고 전한다. 따라서 한반도와 그 주변지역에 강력한 국가가 세워지면서부터 종교행위도 체계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전통종교인 신교(神敎)의 가르침은 선(善)이다. 종교는 진리를 탐구하고, 심신을 수련하고, 신명과 소통하며 정화되어 선업(善業)을 쌓아서 선인(善人)으로 변화하고, 신의 보살핌으로 재앙을 막아주고, 사후에는 선량한 사람으로 태어나거나 천궁에 들 수 있도록 보조하는 역할을 한 것이다. 선행으로 악업을 선업으로 바꾸고, 선도를 닦아 참나(眞我)를 발견하고, 계불의식을 행하여 어진성품으로 복본하고, 경을 읽어 태초의 진리에 도달하고, 정성을 다하여 신을 경배함으로서 철인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이러한 경지에 이르면 생장소병사로 부터 자유로울 수 있고, 전생과 현생과 후생으로 이어지는 악업을 인식할 수 있고, 이러한 악업을 끊음으로서 연속되는 법궤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역대 왕조의 왕들은 신과 상제에 대한 제사로 국가의 제천행사를 중시하였다. 이는 자신의 본주에 해당하는 조상신에 대한 보은과 국가의 발전을 위해 국인과 백성들을 같은 신의 자손으로 통합하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역대 왕조의 왕들은 제천단, 소도, 영고탑, 삼성사, 신궁, 태묘와 종묘 등에서 국가제례를 행하였다. 그리고 일반인들도 가묘(家廟)를 세워 조상신께 제사하였는데 오늘날까지도 다수의 사당과 제실들이 전해져 오고 있다.

역사기록에 의하면, 상고 이래로 삼국시대에 신교뿐만 아니라 유교가 토착화 되었고, 고려를 지나 조선에서는 유교를 중시하였고, 조선후기까지 선인(仙人)들이 존재하였으므로, 전통마을뿐만 아니라 산천이나 강이나 바닷가에는 전통종교의 흔적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산업화 이후로 토지에 건물이 들어서고, 산과 강과 해안이 개발되면서 우리의 전통유적은 점차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최근 문화 다양성이라는 국제적인 흐름으로 인해 세계 각국은 자신들의 전통문화를 새롭게 개선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들 중에는 자신들의 낡은 종교를 새롭게 개선하거나 새로운 종교를 창설하기 위하여 약탈이라는 방법을 동원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이러한 과정에서 일부 극단적인 종교 식민주의자들에 의해 한반도의 수많은 종교 유물과 유적들이 파괴되고 그 다수가 해외로 밀반출되고 있는 것이다.

도굴로, 개발로 그리고 매매로 점차 사라지고 있는 이 땅의 신상과 신단과 신궁을 지키기 위해서는 개발시 문화재 조사를 철저히 하여 문화유적지구인 경우에는 다른 장소를 물색해야 하고, 전국의 전통마을과 산과 강과 해안가를 국립공원이나 역사 유적지구로 보존해야 해야 한다.

이름난 문화재뿐만 아니라 신상과 신단을 훔치는 행위는 재물의 절도에 해당한다. 그리고 신상과 신단은 신앙의 대상이 되는 물건이므로 문화재에 해당한다. 실제로 암벽조각, 토우, 십이지상, 능묘조각, 장승, 석기, 골각기, 산신상, 성모상, 성인상, 석조물, 입석(선돌), 남녀근석, 제단(성황단), 석간(돌기둥) 등이 동산 문화재로 규정되어 있다. 따라서 이러한 문화재를 훼손하거나 허가 없이 반출하는 행위는 불법행위가 되는 것이다.

위의 사진은 상고시대 천부경의 기록이다. 갑골문자로 보는 견해도 있고, 후기 녹도문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우리 고유한 전통종교인 신교가 국문정음(가림다문자)을 사용하던 단군조선 이전에도 존재하였음을 보여주는 좋은 자료이다. 환국에서는 구설과 도형이, 신시에는 녹서가, 중화에서는 갑골문이, 단군조선에서는 전서와 전자(가림다문자)가 사용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천단, 천제단 그리고 제천단은 글자 그대로 상제의 신명께 제사하는 단(壇)이다. 위 사진은 강화도 참성단으로 황천과 황지와 삼황의 신명 그리고 산천의 상제께 제사하는 일종의 소도로 볼 수 있다. 그 위로는 천인과 천녀 그리고 대성과 대해의 성주와 배후가 있다. 우리 국인들이 제단과 신궁 등에서 국조 신명께 제사하는 풍속은 아주 먼 상고시대로부터 시작되었는데 그 풍속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현재 전국의 전통마을과 명산대천과 강과 바닷가에는 신단, 제단 그리고 신궁이 존재하거나 존재한 흔적이 있다.

위 사진은 환구단의 사진이다. 삼국에서는 천지와 신궁뿐만 아니라 오악과 산천단의 제례가 있었고, 신묘 또는 신사 등에서 제례가 있었다.

고려에서는 태묘뿐만 아니라 참성단과 원구단의 제례가 있었고, 신묘 등에서 제례가 있었다. 그러나 고려는 점차 원구단에서 기우제와 기곡제를 지냈고, 중기 이후에는 불교와 도교가 숭상되고 민간에서 무속이 성행하면서 제대로 거행되지 못하였다.

그리고 조선에서는 종묘뿐만 아니라 사직단, 산천단, 참성단 그리고 원단(이후 원구단, 남단) 등에서 제례가 있었다. 상제를 천지신명에 합제(合祭)하는 제사는 사전(祀典)에서 대사(大祀)로 삼았다. 태조 때에 고려의 원구단을 원단으로 고쳤다.

세조 때에 원구단과 원구서를 설치하고, 전(殿)을 짓고, 교사(郊祀)로 상제(上帝)께 제사 올렸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상정고금례(詳定古今禮)에, ‘원구단은 주위가 6장(丈) 3척(尺)이고, 높이는 5척인데 12폐, 3유가 있고 유마다 25보이고, 주원(周垣)이 사문(四門)이고 요단(燎壇)이 신단(神壇) 남쪽에 있으며, 대사(大祀)는 넓이가 1장(丈)이고 높이가 1장(丈) 2척(尺)인데, 호(戶)가 정방(正方) 6척(尺)이고, 위는 터놓고 남쪽으로 나간다.’ 하였습니다." 라고 하니, 그대로 따르고, 다만 주원(周垣) 사문(四門)은 설치하지 말게 하였다.

임금이 면복을 갖추고 원구단에 올라 제사를 지내기를 의식대로 하였다. 호천 상제위(昊天上帝位)·황지기위(皇地祇位) 및 태조위(太祖位)에는 임금이 친히 삼헌(三獻)을 행하고, 대명위(大明位) 및 풍운뢰우위(風雲雷雨位)에는 세자(世子)가 삼헌(三獻)을 행하고, 야명위(夜明位) 및 동남북서해(東南北西海), 악독 산천위(岳瀆山川位)에는 영의정(領議政) 정인지(鄭麟趾)가 삼헌을 행하였다. 세조 이후에는 옛날 교사(郊祀)하던 원구단을 남단(南壇)이라 고쳐서 불렀고, 그 성격도 고려의 기우와 기곡의 제도를 따랐다.

그리고 고종이 대한제국(大韓帝國)을 선포한 이후에 남별궁에 새로운 환구단을 건축하였다. 고종 32년(1895) 윤 5월 20일에 원구단을 건축하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고종 34년(1897) 양력 8월 16일에 원구단, 사직단, 종묘, 영녕전, 경모궁에서 (대한(大韓) 광무(光武) 1년) 연호(年號)를 세운 것에 대해 고유제(告由祭)를 지냈다.

대한제국의 환구단 제도를 보면, 황천상제(皇天上帝)의 위(位)는 제1층 북동쪽에서 남향하여 있고, 황지기(皇地祇)의 위는 북서쪽에서 남향하였다. 제2층 동쪽에는 대명(大明), 서쪽에는 야명(夜明)의 위가 봉안되었으며, 제3층 동쪽에는 북두칠성(北斗七星) · 오성(五星) · 이십팔수(二十八宿) · 오악(五嶽) · 사해(四海) · 명산(名山) · 성황(城隍)의 위와 서쪽에는 운사(雲師) · 우사(雨師) · 풍백(風伯) · 뇌사(雷師) · 오진(五鎭) · 사독(四瀆) · 대천(大川) · 사토(司土)의 위가 모셔졌다. 그리고 제사를 올릴 때에 영신궁가(迎神宮架)에는 중화(中和)의 악, 진찬궁가(進饌宮架)에는 응화(凝和)의 악 등, 여러 주악이 의식에 따라 연주되었다. 순종 4년(1911) 양력 2월 20일, 원구단, 사직서의 건물(建物)과 부지(敷地)를 모두 총독부(總督府)에 인계(引繼)하였다.

따라서 대한제국의 환구단 제도는 황천상제와 황지배후를 천지에 합제(合祭)하는 대사(大祀)이다. 유학(儒學)에, 환구는 상제(上帝)께 제사하는 곳이라는 기록이 있으므로, 환구단은 상제이신 황천상제와 황지배후를 모신 제천단이다. 상제는 신(神)이 아니라 황천과 황지 그리고 역사적인 제왕(帝王)으로 중화에서는 삼황(三皇, 천황, 지황과 인황)과 오제(五帝, 태호 복희씨, 염제 신농씨, 황제 공손씨, 전욱 고양씨와 제곡 고신씨)로 호칭되었고, 청구와 삼한에서는 삼성(三聖, 환인, 환웅과 단군)과 오제(五帝, 태호 복희씨, 염제 신농씨, 황제 공손씨, 전욱 고양씨와 제곡 고신씨)로 호칭되었다.

비록 역사적으로 제사에 신령, 영혼과 혼백이 포함되고, 사방의 기(祇)가 포함되기도 하였고, 또 오사의 귀(人鬼)가 포함되기도 하였지만 형백에 대한 의례는 재계와 수련을 하고, 인기에 대한 의례는 절기행사로 치르고, 인귀에 대한 의례는 장례로 마치는 것이 마땅하다.

따라서 역사(歷史) 속의 상제(上帝)를 하늘과 땅의 신명에 합제하는 경우에, 즉 역사와 종교가 혼합되는 경우에, 황천상제(皇天上帝)의 위(位)는 제1층에 봉안하고, 황지기(皇地祇)의 위는 제외하고, 황천상제의 배후를 봉안해야 한다. 제2층에는 산천의 상제와 배후를 봉안해야 한다. 제3층에는 천인과 천녀 그리고 대성의 성주와 배후를 봉안해야 한다. 제4층에는 일월광명(日月光明)이 되는 대명(大明)과 야명(夜明)의 위(位)를 봉안하고, 오성(五星)을 배위하기도 한다. 제5층에는 중천의 오진(五辰)의 위(位)를 봉안하고, 중방의 오징(五徵)의 위(位)를 봉안하고, 오악(五嶽)과 바다(海)와 오사(五社)를 배위하기도 한다. 제6층에는 이십팔수(二十八宿)의 위(位)를 봉안하고, 전사(電師), 뇌사(雷師), 운사(雲師)와 우사(雨師)의 위(位)를 봉안하기도 한다. 제7층에는 천지문명(天地文明)이 되는 북두칠성(北斗七星)의 위(位)를 봉안하고, 풍백(風伯)과 사토(司土)의 위(位)를 봉안한다. 제8층 그리고 제9층에는 영성의 위(位)를 봉안한다. 그러나 천지신명과 상제를 별개로 제사하는 경우에, 우리 역사 속의 천제(天帝)이신 황천(皇天)과 황지(皇地) 그리고 여타 상제(上帝)를 봉안하여 모시는 것이 바람직하다.

사진 우측에 원형과 사평면의 석축 그리고 원뿔형태의 지붕으로 구성된 곳이 제단이다. 좌측의 팔각모양의 건물은 황궁우이다. 환구단은 일본 강점기인 1913년 철도호텔의 건설로 파괴되어 현재는 황궁우와 석고만 남아 있다. 일본 강점기에 파괴된 환구단을 복원하기 위해서는 우선 기존의 환구단 내에 들어선 현재의 호텔건물과 주변 건물들을 유적지로 매입하여 확보하고, 도로를 우회해야 한다. 그리고 역사 기록에 따라 제단과 건물을 축조해야 한다.



귀신(鬼神)은 무격(巫覡)이 죽어서 흙(土)으로 되돌아가는 물귀를 신격화 한 것으로 비신(非神)이다. 위의 좌측의 사진은 죽으면 흙(土)으로 되돌아가는 물귀의 모습인 귀면(鬼面)이다. 그리고 우측 사진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치우천왕의 혼백이다. 생전의 모습을 그대로 묘사한 영정과 달리 혼백의 모습은 사람이 사후세계에서 가지는 형상이므로 영정과 동일하지 않을 수 있다.